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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개발자를 하려는가

by 까느.dev 2022. 3. 2.

나는 왜 개발자를 선택한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나의 삶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쩌면 개인적인 20대 회고록일수도있고 나중이 되면 이글을 지울수도 있을것같다. 생각이많은 나는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새로운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 일수도 있다.불안함을 안정시키며, 이 도전이 부끄럽지않는 도전이 되기를 미래의 나를 응원하는 글이기도 하다. 

 

20살 건축이란 기차에 오르다.

나는 고등학교때 인문계열을 공부했다. 당시 나는 철학과 인간에대해 궁금점이 많았고 게임을 좋아했다. 대부분의 여가는 게임으로 보냈었던것 같다. 남들처럼 수능을 보았고 생각보다 좋은(공부한것에 비해 조금은 높은) 성적을 얻어 원하는 학과계열로 1곳 그리고 대충 점수를 맞추어 2곳을 지원했다. 결과는 다 떨어졌다. 나는 절망했지만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전문대로 지원을 하였고 아버지가 몸을 담고 있던 건축과를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재수를하며 리스크를 안고 공부할 생각은 못한채로 나는 건축과에 발을 들이기로했다. 건축과를 처음 갔을 때 큰 거부감은 없었다. 

  1. 아버지는 현장 시공소장이셨고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2. 건축을 설계하고 지어지는 과정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건축과를 거부감없이 입학하게 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졌다. 학교 수업들은 진행되었고 나는 설계에 재능이 1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시 건축시장은 최악을 걷고 있었고 학과 교수님들 마져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을정도로 건축의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죽어가는시장, 박봉과 일이힘들다는 등 이러한 이야기들... 나는 1학기 절반정도가 끝났을 때 쯤 자퇴를 하고 수능공부를 다시해야하나 싶었다. 이때가 아마 내가 건축을 떠날 수 있던 첫번째 기회였던것 같다.  철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용기는 없었고, 학과생활이 재밌었는지 시간은 어영부영 지나갔다. 또 건축은 잡학다식하게 다양한것을 요구한다. 설계를 할때 인문학적으로 어떨 때는 미학적으로 어떨 때는 또 공학적으로 설계하는 그런 매력때문에 아마 게속 있었던 것 같다. 1학년이 지나자 모든 동기생들은 군대를 갔고 어떤 계획도없이 나는 덜컥 졸업생인 3학년이 되어있었다.

 

선로위 기차를 다시 타다.

나는 선택을해야했다. 더 늦기전 군대를 가던지, 아니면 3학년을 맞추고 편입공부를 하던지. 편입을 항상 생각했던 나는 전문학사로는 1군 건설사를 신입으로 못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3학년을 졸업하고 편입공부를 1년간 시작을 했다. 아마 이때가 건축을 떠날수 있는 2번째 기회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작은 1군건설사를 가기위해, 또 부족했던 학교간판을 바꾸기위해 편입공부를 시작했지만, 겸사겸사 내가 하고싶었던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23살 나는 편입공부를 시작했다.

내 20대 중 편입공부기간이 내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 남들에게는 보통 가장 암흑기 같던 시간으로 생각되었을텐대 나는 이 1년이 가장 행복했다. 1년간 나는 몰입했고 최선을 다했고 결과는 못미쳤지만 후회는 없었으며,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배웠다. 편입공부를 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처음으로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고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클리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300점대였던 토익점수를 3개월간 800점대로 끌어 올렸다. 스터디를 만들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재미도 있었다. 공부하는 동시에 지칠까봐 시작했던 운동도 재미룰 붙였고 아이러니하게도 내인생에서 가장 몸이 좋은 시기였다. 그렇게 편입영어공부를 동시하 진행하면서 혼자 공부의 한계를 느꼈고 수학공부는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어 편입학원을 7월달에 다니게된다. 수학은 고등학교이후 멀리하며 지내다 보니 기초수학의 어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중학교수학도 낯설게 느껴졌고 나는 절망적이였지만 매일 밤늦게까지 중고등학교 수학을 복습하고 학원 진도를 따라 나갔다. 모의고사는 12월까지 20문제중 1~2문제만 푸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절망하지않고 게을리하지않았다. 시험은 대부분 1월에있었고 나는 운에 좋게도 내가 목표한 최저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과는 건축공학과였다. 건축이 싫었지만 건축을 선택했다. 왜였을까? 당시 이 고민때문에 1달간 공부를 못한적도 있었다. 내가 궁금하고 하고싶은과로 전과하는것이 맞는가? 아니면 건축을 선택해서 일단 알고있는 길을 걷는가? 라는 2가지 고민이였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가 건설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 당시에도 용기가없었다. 내가 하고싶어서 들어간 과가 내가 생각했던것과 많이 다르면 어쩌지? 잘 따라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체 후회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때문에 나는 잘 알고 있는 건축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렇게 건축을 떠날수 있는 2번째 기회를 나는 버렸다. 나는 아버지가 깔아준 선로를 따라 내 20대는 방향을 틀지못한체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는 이렇게 살 수 없어.

편입을하고 난 군대를 입대했다. 군대도 야전건설병으로 입대하여 건축과 관련된 건설감독병을 노렸지만 아쉽게도 지뢰와 폭파를 담당하는 전투공병에서 군복무를 맞추고 나는 복학하여 학교를 그냥저냥 다니며 졸업을 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 23살때 1군건설사를 목표를했던대로 1군 건설사에 덜컥 입사를 하게 되었다. 본사근무를 제의 받았지만 건설을 하려면 무조건 현장을 알아야돼 라는 마인드로 복을 재발로 걷어 차버리고 나는 현장으로 바로 발령을 받아 일을 시작했다. 아침 6시30분까지 출근하여 체조를하고 작업자 및 공정을 관리하며 아침밥을 먹으며 삶이 시작했다. 현장이 5~6시쯤 대충 정리가되면 사무업무가 시작된다. 보통 퇴근시간은 7~8시였던것 같다. 그렇게 퇴근을하면 조금 힘이있는날이나 분노가 차오르는 날이면 운동을하고 아니면 그냥 곯아 떨어졌다. 현장의일은 굉장히 거칠었고 직장상사도 많이 거칠었다. 작업자와도 싸우고, 감리와도 투닥거리며 싸우고, 타부서의 사람들과도 싸우고, 나 자신과도 싸우고, 비오면 비를 막고, 창을닫으며, 눈오면 눈을치웠다. 모든것이 재미없고 따분했다. 그리고 죽도록 힘들었다.

일하기전 항상 그런말을 들었다. 10년, 15년후 나의모습이 차장, 과장님의 모습이라고..... 나는 저렇게 살기 싫었다. 가정과 떨어져 그리고 이상한 유흥과 현장 특유의 감성에 빠져들기 싫었다. 나는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않기위해 매일 공부를 조금씩했고 건축을 알기위해서 여기저기 공부를했다. 하지만 건축시장에서 있는것이 나에게 맞는 일인가 싶었다. 나는 여기가 싫었고 작업환경은 혐오스러웠다. 모든 사람은 부정적이였으며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저 이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 문화에서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로 보였다. 나는 이 문화를 견딜자신도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여기서 나오기위해 프롭테크 라는 개념을 배웠다. 4차산업시대, ai,빅데이터,자동화 등 이러한 하이테크는 혐오하던 시장에서 한발짝 나올 수 있는 시야를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나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그저 버티라는 아버지의말, 나의 의견과 내가 하고싶은 꿈을 말했지만 아버지가 바라보았을 때 그 모든것들은 그저 건축의 문화를 못버티는 철없는 아이의 도망치기 위한 변명이였고 거짓말이였고 벗어나기위한 궁여지책 정도로만 보였을 것이다. 너가 그 일을 잘할수 있을것 같냐?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냐? 그 일을 하기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는 봤냐? 라는 말들이였다. 하나 같이 맞는 말이였고 나 또한 내가 못버티는건지 아니면 진짜 다른일을 하고싶은 것인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비수같은말에대해 반박할 수 없었다.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나는 죽어도 이일을 10년 이상 이어나갈 자신도 의지도 모두 타서 없어지고 난 후였다.

 

 

탈선을 결심하다...

무언가 빨리 결정을 내려얌만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게속 지나가고 나는 초초해져만 갔다.
나는 결정을내렸다. 일단 퇴사를 하기로... 그리고 바로 인테리어 업체로 취업을 했다. 결혼을 준비중이였기에
일은 쉴순 없었고 연봉은 반으로 줄었지만 직접 설계를 하면서 현장을 다니며 집을 바꾸어가는 모습을 볼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지방이아닌 서울에서 출퇴근 할 수 있는게 가장 큰 매리트였다. 하지만 은퇴전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1년간 했었던것 같다. 어떤때는 기분이 좋았고 어떤때는 당장 그만두고 싶을때도 있었다. (건설업과 인테리어의 일에대한이야기는나중에 자세히 다뤄보려고한다.) 어찌되었든 나의 대답은 아니요 였다. 이것을 업으로 하였을 때 나는 그냥저냥 살아갈거 같았고.(재능도 적성도 안맞았다.) 매일 사람들과 게속 스트레스 쌓이고 싸우며 바로 결정하며, 시간에 쫓겨 일하는 방식은 내스타일과 맞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기로했다. 그게 지금 시작하려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다.  나는 그렇게 20대에 타오던 선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선로가 아닌 길 위를 자유로히 걸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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